부조리는 소리 없이 쌓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하던 독은 방향을 잃고 자신을 향해 무너져 내린다. 가브리엘의 이야기는 그 잠식의 바깥을 보여준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
출처: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양을 몰던 가브리엘은 우연히 숲에서 말을 타는 한 여자를 보게 된다. 여자는 말 위에서 대담하게 몸을 뒤로 젖힌 채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가 그곳을 빠져나오며 몸을 일으키던 순간, 매고 있던 스카프가 나뭇가지에 걸린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잃은 에버딘은 혼자가 익숙했다. 가브리엘이 잃어버린 자신의 스카프를 건네며 청혼했을 때, 에버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가브리엘은 100에이커 농장에서 양 200마리를 키우는 건실한 사내였다. 빚을 다 갚고 나면 농장은 우리의 것이 될 테고, 그러면 편하게 취미를 즐기며 지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독립심 강한 에버딘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날 밤,가브리엘의 양치기 개는 실수로 양들을 모두 절벽으로 내몬다. 양을 잃은 가브리엘은 파산하게 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신세가 된다.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브리엘은 웨더버리 농장을 찾는다. 밤중에 도착한 그곳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가브리엘은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헛간 위로 올라가 지붕을 내리쳤다. 밤새 진화 작업을 마치고 얼굴이 까맣게 탄 가브리엘 앞에 선 것은 말끔한 차림의 에버딘이었다. 에버딘은 삼촌에게 농장을 물려받아 이곳의 새 주인이 되어있었다. 둘의 처지는 이전과 달랐고, 가브리엘은 더 이상 에버딘을 욕심낼 수 없었다.

가브리엘은 에버딘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불길에 농장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막고, 클로버 잎을 먹고 죽어가는 양들을 살리고, 폭풍으로부터 수확물을 지켜냈지만, 에버딘은 그런 성실함 대신 화려함에 유혹된다. 붉은 군복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 손쉽게 에버딘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사내를 보면서도, 가브리엘은 여전히 성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으려 한다.

변덕스러운 세상에 비웃음 당할 때, 우리는 시간에 기댈 수 있다. 흐르는 시간 안에서 일상은 반복되고, 반복은 끝끝내 포장을 벗겨내어 그 본질을 드러낸다. 주인이 된 에버딘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의 처지가 언제까지나 이렇지는 않을 거라는 가브리엘의 말은, 선언이나 위협이 아닌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 손들을 비로소 에버딘이 알아본 것은, 극적인 어느 순간이 아니라 반복된 일상의 나날들이 쌓인 결과였다. 시간은 그렇게 조금씩 먼지를 쓸어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가브리엘은 에버딘의 삶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