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트랜서핑
출처: 정신세계사

트랜서핑

트랜서핑은 자신의 운명을 말 그대로 골라잡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아닌 현실과 얼마나 맞아떨어지느냐다. 공리들은 그 자체가 양자물리학의 최초의 기준점이기 때문에 증명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진리가 구체화되어 실현된 것이나 어떤 법칙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우리의 모델을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가능태

존재 가능한 모든 물체와 그 동선상의 무한수 지점에 관한 데이터는 정보의 장 속에 저장된다. 이 정보의 장을 가능태 공간이라 한다. 가능태 공간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과,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사념 에너지의 파동은 잠재된 가능태를 물질화시킨다. 뭔가를 생각할 때마다 사념 에너지의 주파수는 가능태 공간의 한 섹터에 동조된다. 그러면 그 섹터 고유의 가능태가 물질화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의 사념 에너지가 특정 주파수에 고정되면, 그 사람은 거기에 맞는 인생트랙으로 옮겨진다. 뭔가를 피하려는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갖게 될 위험은 더욱 커진다. 원하지 않는 것에 맞서 싸우는 것은 사실 바로 그것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펜듈럼

사람들의 사념 에너지에 의해 그 특질이 형성된 모든 구조체를 펜듈럼이라고 한다. 펜듈럼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지지자 개인으로부터 에너지가 끊임없이 흘러오게 하는 것이다. 펜듈럼은 지지자의 에너지를 먹고산다. 그로써 펜듈럼은 진폭이 점점 커진다. 트랜서핑도 하나의 펜듈럼이 될 수 있다. 펜듈럼의 파괴적인 정도는 저마다 다르다. 트랜서핑은 최악의 경우에도 훨씬 덜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펜듈럼에게는 새로운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에너지를 얻어내지 못하면 펜듈럼은 멈춘다. 펜듈럼은 자신에게만 건설적이고, 우리에게는 건설적이지 않다.

성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펜듈럼과 싸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선택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면 거부하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 거부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받아들임은 무엇을 껴안아 자신의 일부로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다. 받아들임이란, 만물이 그 자체로서 존재할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 주고 그것을 담담하게 지나쳐 가라는 뜻이다. 삶에서 어떤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것을 담담하게 지나쳐가라. 삶 밖으로 무엇을 내던진다는 것은 회피가 아니라 그냥 무시하라는 뜻이다.

문제는 인간 세상이 온통 펜듈럼 위에 건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항상 뭔가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존재다. 자유란 다른 사람들의 펜듈럼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유로운 상태로 있으면서 동시에 진정한 성공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인생 트랙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과 상황을 스스로 알아차리고만 있다면 펜듈럼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펜듈럼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펜듈럼의 영향 아래에 놓이는 것을 피하고 펜듈럼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의식적으로 이용할 것인가이다.

균형력

자연 속의 모든 것은 균형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에너지의 잉여 포텐셜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곳에는 불균형을 제거하려는 균형력이 나타난다.

어떤 평가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와 중요성이 부여될 경우에만 잉여 포텐셜이 일어난다. 잉여포텐셜은 어떤 것의 가치가 실제에 비해 큰 차이(변위)가 있을 때 생겨난다.

세상과 조화롭게 지내고 펜듈럼에게서 벗어나려면 과도한 중요성을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 당신이 자신과 주변 세상에 대해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지를 늘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당신 내면의 '지켜보는 자'는 잠들어서는 안 된다. 중요성이 줄어들면 당신은 이내 균형 상태에 들어가고, 펜듈럼이 당신을 지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정도에 알맞게 하라. 이따금씩 균형력을 깨뜨리도록 자신을 허락하라. 그런다고 해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늘이 적절한 범위의 눈금을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다.

영혼

잠재의식(영혼)이 정보장으로부터 데이터를 받아들이면 의식(마음)이 그것을 소리나 상징으로 번역한다. 이것이 새로운 것―음악, 미술작품 등 사람이 직접적으로 보거나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창조되거나 새로이 발견되는 방식이다. 또한 직관적 지식과 예감이 일어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영혼은 범주를 사용하지 않는다. 영혼은 느낌으로써 안다. 마음의 통제가 약해지면 그 틈을 타서 직관적 지식과 느낌이 의식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내면의 목소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생각하지 않고 직감으로 느낀다.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을 지어내느라 바쁘다. 영혼의 목소리는 이 '생각 믹서'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만일 이 생각의 흐름을 멈추고 단순히 비어 있는 상태를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벽별이 속삭이는 소리, 내면의 말 없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은 두 가지 대조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정보장에 접근할 수 있다. 영혼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으나 다가오고 있는 섹터들에 놓여 있는 것을 어떻게든 미리 내다본다. 만일 영혼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섹터에 동조한다면,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좋든 나쁘든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영혼의 느낌들이 마음에게는 편안한 기분이나 불편한 기분과 같은 모호한 느낌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정의 순간에 영혼이 마음에게 하는 말을 명확히 알아듣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당신의 지켜보는 자에게 영혼의 기분 상태를 잘 살피라고 부탁해놓기만 하면 된다. 새벽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려면 영혼의 기분 상태 살피기를 제때에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만일 뚜렷한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아직도 귀 기울여 듣는 데에 아주 서툴다는 뜻이다.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정말 애매모호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런 부정확한 데이터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마음이 제안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질문을 좀 더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의도

자각몽 속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꿈속에서 의식이 깨어서 공중을 날고 싶어졌다면 날고자 하는 의도만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욕망과 의도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몸을 공중에 띄우기를 원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팔을 들어 올리려는 욕망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은 자신에게 팔을 올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제는 그냥 팔을 들어 올려보라. 당신의 희망은 행동으로 옮겨졌다. 당신은 팔을 어떻게 들어 올릴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하고 있다. 꿈에서도 마찬가지다. 순수한 의도를 사용하여 그냥 자신을 공중에 띄워라. 그리고 어디든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라.

꿈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환영이 아니다. 마음은 꿈을 상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보고 있다. 꿈은 과거나 미래의 가능한 사건을 보여준다. 꿈은 영혼이 가능태 공간 속을 여행하는 것이다. 가능태 공간 속에는 온갖 시나리오가 다 있다. 자각몽 속에서 꿈의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시나리오 자체가 실제로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수시로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골라잡는 것이다.

꿈과 현실은 기본적으로 같다. 유일한 차이는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나는 속도뿐이다. 현실 속의 사건도 꿈속의 사건과 동일한 법칙을 따라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번개처럼 빨리 일어나지는 않는다. 가능태가 물질 차원에 실현되는 데에는 불활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아주 종종, 목표를 향해 충분히 끈기 있게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목표들이, 단지 현실화될 시간을 갖지 못한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 삶에서는 의식의 각성도가 꿈속에서보다 높다. 이것은 내부의도를 제어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외부의도는 이보다 훨씬 높은 각성도를 요구한다. 자각몽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삶에서도 외부의도를 제어하려면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 현실 또한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꿈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도 지배력을 얻으려면 참여자로부터 관찰자로 역할을 바꿀 필요가 있다. 수동적인 꿈에서는 관찰자는 없고 배우만 있다. 당신은 자신의 역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어서 상황을 밖으로부터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의 역할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말라. 내적, 외적 중요성을 최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그 열쇠다. 당신의 지켜보는 자를 항상 대기시켜라. 상황을 지배하는 능력은 당신의 깨어있는 정도에 비례한다. 꿈속에서는 의식의 각성도가 낮고, 그것이 꿈이 '일어나는' 이유다.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상황이 통째로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사를 절대적으로 완전히 지배한다는 것은 꿈속에서조차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단지 선택할 권리가 있을 뿐이지 무엇을 변화시킬 권리는 없다. 개어있는 의식은 통제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관찰을 위한 것이다. 통제력은 오직 부정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 대신 유쾌한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그것을 당신의 삶 속에 맞이하여 온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만 발휘되어야 한다. 당신의 시나리오를 세상에 강요하지 말라. 특정 가능태가 스스로 실현되게끔 세상이 허용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열어두라.

현실화를 가져오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원하는 대상을 노리고 있는 당신이다. 가지겠다는, 그리고 행동하겠다는 결정으로 정의할 의도다. 욕망은 목표 그 자체를 지향하지만 의도는 그 목표에 다다르는 과정을 지향한다. 의도는 잉여 포텐셜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포텐셜 에너지가 행동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욕망과 행동은 의도 속에서 하나가 된다. 의도는 욕망과 행동의 조합이다. 자신만의 힘으로써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부의도다. 의도의 작용을 외부 세계로 확대시키는 것은 그보다 훨씬 힘들다. 그것이 외부의도다. 외부의도의 도움으로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 주변 세상이 어떻게 행동하게 할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탁자 위에 연필이 놓여 있다. 당신은 의도의 힘으로써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상상한다. 당신의 의도는 연필이 다른 장소에 놓여있는 가능태 공간의 섹터를 찾아낸다. 사념 에너지가 충분한 힘으로 방사된다면 연필은 실제 공간 속의 새로운 지점들로 차례로 옮겨가면서 물질화될 것이다. 연필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힘은 매우 미약하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기가 너무나 어려워서 자기 안에서 순수한 의도를 일으키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물체를 원격 이동시키는 염력을 지닌 사람들은 대상 자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의도의 힘으로 에너지를 보내어 가능태 공간에서 대상이 물질화되는 지점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닌 것이다.

욕망은 목표 자체에다 주의를 모으는 것이다. 내부의도는 목표를 향해 움직여가는 과정에 주의를 모으는 것이다. 외부의도는 목표가 스스로 실현되는 이치에 주의를 모으는 것이다. 내부의도는 목표를 성취하는 반면에 외부의도는 목표를 선택한다. 내부의도가 행동하겠다는 결정이라고 한다면 외부의도는 가지겠다는 결정이다.

외부의도는 관찰자의 입장을 취한다. 당신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지만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다. 당신은 무엇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대신 선택한다. 외부의도는 내가 날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내가 날고 있는 것을 인지한다.

꿈속에서 졸고 있는 마음은 공중을 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하려고 애써도 깨어있는 마음으로서는 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단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의심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지식은 의심을 쫓아내준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

꿈속에서 날기 위해서는 약간의 외부의도만 있으면 충분한 반면에 불활성 물질 현실의 세계에서는 의도가 절대적으로 순수해야 한다. 순수한 의도를 얻기란 불가능하지만 다행히 목표를 이루는 데는 '2등급' 의도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불활성 물질이 '제대로 펼쳐져서' 실현되는 데는 단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지 말라. 당신이 주문한 것이 올 때까지는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의도의 순수성에 달려 있다. 의도에서 욕망을 반드시 씻어내야 한다. 일자리를 구한다고 가정했을 때, 당신은 고용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면접을 하기 위해서 면접장에 간다. 자신이 주문한 것에 무관심할수록 그것은 더 빨리 이루어진다.

의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의도는 믿지도 않고 소망하지도 않는다. 의도는 단지 행동할 뿐이다. 의도는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팔을 들어 머리를 긁고자 하는 의도는 잉여 포텐셜이 전혀 없는 의도의 한 보기다. 아무런 욕망도 없이 오로지 순수한 의도만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적, 외적 중요성을 낮춰야 한다. 중요성을 처리하는 간단하고 효과적인 처방이 하나 있다. 미리 패배를 받아들이라. 일단 패배를 받아들였으면 더 이상은 패배도 성공도 생각지 말고 그저 목표를 향해 계속 걸어가라. 잡지를 사러 신문 가판대로 걸어가듯이 목표를 향해 걸어가라. 가판대에 신문을 사러 가는 데에 결단성과 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욕망은 이미 없다. 욕망은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던 순간까지만 있었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 가판대에 신문이 없더라도 당신은 흥분하지 않는다. 설사 충족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데 가서 사면 그만이다. 의도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잉여 포텐셜로부터도 자유롭다.

트랜서핑의 핵심은 내부의도를 거부하고 외부의도를 사용하는 것이다. 내부의도가 끝나고 외부의도가 시작되는 경계선을 긋기는 어렵다. 내부의도는 마음(의식)이 영혼(잠재의식)과 합쳐서 일치되고 조율될 때 외부의도로 변한다. 이 경계선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꿈속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공중에 띄워서 나는 느낌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또는 자유낙하의 느낌이나, 자전거 타기에 처음 성공했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슬라이드

인간은 백 퍼센트 객관적으로 주변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이것은 슬라이드 영사기와도 유사하다. 고르고 규칙적인 빛이 슬라이드 필름을 통과하면 화면 위의 그림으로 변한다. 인식이 스크린이라면 빛은 우리 주변 세계이고, 슬라이드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 곧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슬라이드는 현실의 왜곡된 표현이다. 슬라이드는 당신의 머릿속에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 속에는 없는 무엇이다. 당신이 자신의 못생긴 외모에 대한 슬라이드를 마음속에 끼우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든 것을 그 슬라이드를 통해 인식한다. 우호적인 미소는 비웃음으로 바뀌어 보인다. 실제로는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슬라이드다.

슬라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성이다. 외모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외모가 당신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슬라이드는 당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슬라이드는 상상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환영이라고 봐도 된다. 이런 종류의 환영은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외부의도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하여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예다.

부정적 슬라이드는 대개 영혼과 마음의 일치를 불러일으킨다. 이럴 경우 외부의도는 거침없이 순조롭게 작용한다. 다만 그 전이는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슬라이드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기를 그치거나 긍정적 슬라이드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방향을 돌릴 때까지 계속된다.

당신이 할 일은 자신의 좋아하는 면이나 가지고 싶은 면으로 주의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긍정적 슬라이드는 부정적 슬라이드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행동과 태도에 직접적인 힘을 미칠 것이다. 당신은 뜻밖에, 무의식적으로 슬라이드에 맞추어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일은 모두 외부의도가 슬라이드의 이미지에 맞추어 해줄 것이다.

슬라이드가 해체될 때까지 우리는 만들어낸 이미지를 생각 속에 계속 재생시켜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슬라이드는 실질적으로 당신의 일부가 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슬라이드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은 더 이상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중요성은 사라지고 슬라이드도 해체되지만 임무는 완수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마음과 일치했다는 뜻이다.

마음이 슬라이드를 현실로 만들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영혼 깊은 곳에서 당신은 이것이 한갓 현실로 가장한 게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조직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이 이미지를 계속 굳혀 가면 결국 영혼은 거기에 익숙해져서 그 슬라이드를 자신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외부의도는 슬라이드를 금방 인식하지 못하고 서서히 인식한다는 점을 유념하라. 슬라이드의 이미지를 잊지 말고 그것을 늘 의식하라. 슬라이드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그 내용이 외부의도에 의해서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안락지대

자신이 성공하리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 비싼 가게에 들어가기를 겁낸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싼 가게에서 눈곱만큼이라도 불편을 느낀다면 당신은 비싼 물건을 소유하도록 스스로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비싼 가게의 물건을 살 수 있다고 자신을 확신시키려 애쓰는 자기암시 훈련은 물론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호주머니엔 빈 지갑밖에 없으면서 비싼 물건을 살 수 있다고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그게 아니다. 당신은 어쨌든 간에 소원은 실현되리라는 말에 대해 영혼 깊은 곳에서 늘 얼마간의 의심을 품고 있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심한다는 것은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느끼도록 스스로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가지도록 스스로 허용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것이다. 당신도 자신에게 가지도록 허락해야 한다. 이 상태는 자전거를 처음으로 탈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기분과도 흡사하다. 의심과 주저와 반론이 사라져 버렸다.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고요한 명료함, 곧 앎이었다. 말 없는 명료한 느낌, 뭔가를 믿지 않고 아는 것, 주저 없는 자신감이 바로 영혼과 마음이 일치된 상태다. 이 같은 상태는 자신이 마치 우주를 지배하는 무언의 힘의 필수불가결한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루기 힘든 꿈을 가진다는 것이 단지 개인적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당신은 가슴속에서 믿지 않는다. 하지만 긍정적 슬라이드가 이 믿기지 않는 것을 당신의 안락지대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모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면 망설임이 사라지고 믿음은 앎으로 바뀔 것이다. 영혼은 마음과 일치를 이뤄내고, 그것이 당신이 가지기로 결정하는 때다.

영혼을 설득하려 드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영혼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알뿐이다. 영혼은 길들일 수 있을 뿐이다. 영혼은 새로운 안락지대에 익숙해져야 한다. 슬라이드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슬라이드의 도움을 받으면 영혼과 마음의 일치가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 요새는 오랜 기간의 지배로써만 빼앗을 수 있다. 머릿속에 당신의 꿈의 슬라이드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의식 속에 늘 간직하라. 외부의 관찰자처럼 슬라이드를 바라보고만 있지 말라. 그 속에 자신을 몰입시키고 최소한 가상으로라도 그 속에서 살라. 슬라이드는 오랫동안 용의주도하게 상영되었을 때만 결실을 가져올 것이다.

비싼 가게에서 물건 고르는 연습을 할 수도 있다. 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가격표도 들여다보지 말라. 목표는 돈이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있는 그것이다. 그저 가까이에서 그것의 느낌을 느끼면서 골라보고, 말없이 살펴보면서 평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사치품인 것처럼 바라보지 말고 사려는 물건처럼 바라보라. 당신이 그것의 주인인 것처럼 느껴라.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것이 될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지기로 결정하기만 하면 외부의도가 당신이 생각조차 못 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과정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또 한 가지 실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어내려고 덤벼드는 것이다. 가능태 흐름은 당신이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헤엄쳐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최종 목표가 한 발짝 밖에 있지 않은 한 최종 목표에 집중하는 것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목표에 집중하는 것은 욕망이다. 목표를 향한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은 의도다. 심상의 초점은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에 있다. 욕망이 의도와 다른 것만큼이나, 목표 자체를 심상화하는 것은 목표를 이루는 과정을 심상화하는 것과 같지 않다. 팔을 올리려고 할 때, 팔을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목표인 올려진 팔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팔을 올려라. 앞부분에서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지만 이루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 뒷부분에서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는데, 의도는 팔이 올라가고 있는 동안 계속 작용하고 있다. 목표는 당신이 추구해야 할 무엇이기는 하지만 당신이 실제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어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그저 원하고 자신이 거기에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필요한 단계를 밟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즉 그 과정을 실천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오래 걸리는 과정이라면 그 과정 자체를 심상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작업을 하는 중간중간에 작품이 점점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오늘 당신은 작품의 세밀한 부분을 조금 완성시켰다. 내일은 또 새로운 모습을 갖출 것이다. 당신의 작품이 변해가는 모습을 상상하라. 어떤 경우든 과정을 심상화하라. 단지 최종 결과만을 상상하는 것은 안락지대를 넓혀주고, 그것만도 상당한 일이긴 하지만,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을 심상화한다면 당신은 외부의도의 작용을 한층 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이는 점진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목표가 멀리 있는 인생 트랙 위에 놓여 있다면 그 인생 트랙에 맞추어 사념 에너지를 방사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금방 도달할 수 없는 인생트랙을 따라 움직이는 과정을 심상화하는 것은 당신을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다. 목표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싫어도 각각의 단계를 순서대로 다 밟아야 한다. 트랜서핑의 심상화란 전이 사슬 중 현재의 고리가 현실화되는 과정을 마음에 그리는 것이다.

목표를 실현시킬 방법을 알지 못하더라도 조바심 내지 말라. 침착하고 용의주도하게 슬라이드를 계속 심상화하라. 목표가 안락지대 안으로 완전히 융화되어 들어오면 외부의도가 적당한 방법을 던져줄 것이다.

에너지

자유에너지는 인체를 통해 흐르는 우주의 에너지다. 당신이 만일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에너지가 부족함을 뜻한다. 자유에너지가 없으면 의도도 있을 수 없다. 의식적으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에너지 통로를 의도적으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그 통로로 에너지가 흐르게 해야 한다.

편안하게 근육을 긴장시키지 말고 똑바로 선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땅에서 위로 올라오는 에너지의 흐름을 상상한다. 땅에서 올라온 에너지는 회음을 통해 몸으로 들어와 척추를 타고 위로 올라온다. 그 에너지는 머리 꼭대기에서 밖으로 나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제 숨을 내쉬면서 상상한다. 하늘 높이 어딘가에서 에너지의 흐름이 내려온다. 그 에너지는 당신의 머리 꼭대기를 통해 들어온 다음 척추를 따라 내려와 몸 밖으로 나와서 땅속으로 들어간다. 이 흐름을 육체적 감각으로 느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을 그저 상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감각도 발달하여 이 흐름이 지나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체 안에는 자유에너지를 모아둘 장소가 없다. 자유에너지는 온 우주로부터 몸 안으로 들어온다. 통로가 충분히 넓으면 그 에너지를 얻을 것이고, 통로가 좁으면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강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통로의 넓이에 관련된 문제다. 이 에너지가 자신에게 흘러 들어오게 하는 법을, 그리고 자신이 우주의 일부임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에너지 차원에서 주변 세상과 일체감을 느끼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에너지를 축적하려고 하지 말라. 에너지가 반대 방향의 두 흐름으로 당신의 몸속을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허용하라.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이 대양 속의 한 물방울이라고 상상하라. 당신은 우주의 일부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를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다. 몸에다 에너지를 비축하지 말라. 온 우주와 하나가 되어라. 그렇게 하면 외부의도를 약간만 움직여도 내부의도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을 어느 정도의 시간 안에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두 흐름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 중심점이 몸의 가운데쯤에 위치하도록 하라. 마음으로, 그 중심점으로부터 에너지 구체 전체로 에너지를 방사하라. 너무 열심히 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함으로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이따금씩 척추 앞쪽 부위를 마음으로 응시하라. 그리고 상승 흐름이 올라가고 하강 흐름이 내려가는 것을 마음으로 그려라. 자연스럽게 흐름을 느끼는 습관이 길러진다.

에너지는 중앙의 흐름 형태로 사람의 몸 안에 들어온다. 그런 다음 그 에너지는 사념에 의해 모양이 갖춰지고, 몸에서 빠져나갈 때 이 사념들에 상응하는 매개변수를 획득한다. 이렇게 변조된 에너지는 가능태 공간의 상응하는 섹터에 가해지고, 그 결과 그 가능태가 물질적으로 실현된다.

조율

조율이란 마치 목표가 이미 이루어진 양 목표를 생각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것이다. 조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요성을 내려놓고 의식적으로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중요성을 내려놓기는 어렵다. 이 상황을 효과적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 마음의 습관을 이용해서, 마음에게 새로운 게임을 권하면 된다. 나쁜 일이 일어나면 의식을 일깨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의식적으로 따져보라. 그리고 당신의 태도를 바꾸라. 비관적으로 보이는 변화를 낙관적인 것으로 바라보기를 의도하라.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목표의 슬라이드를 상영하고 조율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조율은 연습의 문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켜보는 자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조율은 가능태 공간 속을 움직여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모든 사건을 긍정적으로 대하여 항상 바람직한 갈래로 올라서라.

파괴적인 펜듈럼과의 게임을 받아들이지 말고, 쓸모가 있어 보이는 펜듈럼을 찾아서 게임을 벌이라. 이것은 긍정적이고 좋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당신을 옭아매려는 펜듈럼임을 기억하는 것, 그것을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을 기억하는 순간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기억해 내기만 한다면, 펜듈럼을 그냥 지나가게 하거나 꺼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당신에게는 펜듈럼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아주 끈기 있고 단호하게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결국에는 새로운 습관이 낡은 습관을 몰아낼 것이다.

의심

영혼이 의심을 품는다면 영혼을 설득하거나 확신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 근본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믿음이라는 말을 당신의 관념틀 속에서 없애버리고 그 대신 앎을 그 자리에 갖다 놓으라. 마음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그저 알기만 한다면 설득할 필요 없이 영혼은 거기에 동의할 것이다. 이 앎을 얻는 것. 그러려면 이 앎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세월과 함께 사람들은 전화, 텔레비전, 비행기 등 온갖 희한한 것들에도 곧잘 익숙해진다. 슬라이드 기법을 적용하라. 이 앎을 당신의 머릿속에 품어서 먹이고 길러야 한다. 목표가 이루어질 것임을 당신이 알고 있음을 수시로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목표를 생각할 때 당신은 다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의심을 하고 목표를 이룰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의심은 물론 있을 것이지만 당신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바로잡아야 한다. 의심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의심을 쫓아내려고 너무 애쓰지만 말라. 의심의 존재에 저항하지도 말라. 의심을 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거려라.

믿음의 미궁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미궁의 벽도 외부의도가 사과가 하늘로 떨어지는 것을 당신 눈앞에 보여줄 때면 허물어지게 되리라는, 그런 희망은 있어야 한다. 이런 희망조차 없다면 트랜서핑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희망을 발견하면 마음이 발판을 얻고 영혼은 생기를 되찾는다.